비디오 대여점에 들어서면 벽면을 빼곡히 채운 비디오테이프와 영화 포스터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회원카드를 내고, 보고 싶은 영화의 제목이 적힌 대여 기록을 확인한 뒤, 반납일을 살폈지요. 직원이 “이 영화 재미있어요”라며 비슷한 작품을 골라주기도 했고, 인기작은 이미 대여 중이라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그때 영화 한 편을 고르는 일에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리모컨을 들고 TV 앞에 앉거나 휴대전화 앱을 열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나타납니다. 선택지는 훨씬 많아졌는데, 이상하게도 무엇을 볼지 결정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매장에서 고르던 영화는 어떻게 추천 알고리즘과 개인 프로필 속 목록으로 바뀌게 됐을까요?
회원카드와 반납일이 있던 시절
한국의 동네 비디오 대여점은 1980년대 후반부터 VCR과 VHS 보급이 늘면서 성장했고, 1990년대 초·중반에는 많은 사람이 영화를 집에서 보는 익숙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매장에 진열된 비디오테이프를 고르고, 회원으로 등록한 뒤 일정 기간 빌려 보는 방식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버튼 하나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매장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대여한 테이프는 정해진 날까지 가져다줘야 했고, 늦으면 추가 비용이 붙었습니다.
회원카드에 영화 제목과 대여일, 반납 예정일을 적거나 도장을 찍는 방식은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장면입니다. 다만 모든 대여점이 똑같은 양식과 절차를 사용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점포마다 회원카드와 종이 장부를 운영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도 분명한 것은 있었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보는 일이 ‘지금 당장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빌리고, 기억하고, 반납하는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반납일은 영화를 다 봤는지와 상관없이 다가왔고, 인기작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VHS에서 DVD, 그리고 TV 속 VOD로
비디오테이프는 영화를 집으로 가져오는 물리적인 매체였습니다. 테이프를 VCR에 넣고 재생해야 했고, 여러 번 보다 보면 마모될 수 있었습니다. 원하는 장면을 찾으려면 되감기와 빨리 감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DVD가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DVD는 디지털 방식으로 영상을 저장해 VHS보다 선명한 화면을 제공했고, 장면 선택과 자막, 여러 음성, 부가 영상 같은 기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했던 비디오테이프와 달리, 메뉴 화면에서 원하는 장면을 바로 고를 수 있었지요.
그렇다고 VHS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두 매체는 일정 기간 함께 사용됐고, DVD 대여점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DVD 대여점의 성장세가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불법 복제 영상과 온라인 다운로드, 케이블TV와 IPTV의 VOD 서비스가 동시에 확산했기 때문입니다.
VOD는 매장에 가지 않고도 TV 화면에서 영화를 고를 수 있게 했습니다. 리모컨으로 목록을 살펴보고, 보고 싶은 작품을 건별로 구매하거나 대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반납을 위해 다시 매장에 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영화 이용의 중심이 진열대에서 화면 속 메뉴로 옮겨간 순간이었습니다.

‘빌려 보는 영화’에서 ‘접속하는 영화’로
VOD가 편리함을 가져왔다면, 스트리밍 서비스는 영화 이용의 비용과 시간을 더 크게 바꿨습니다. 한 편씩 대여료를 내는 대신, 월정액을 내고 서비스 안에 있는 여러 작품을 이용하는 방식이 등장한 것입니다.
물론 현재의 영상 서비스가 모두 같은 형태인 것은 아닙니다. 월정액으로 보는 서비스가 있는가 하면, 광고를 보는 대신 이용료를 낮춘 요금제도 있고, 작품별로 구매하거나 대여하는 방식도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용자가 느끼는 변화는 분명합니다. 예전에는 영화 한 편을 ‘빌리는’ 일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콘텐츠가 있는 서비스에 ‘접속하는’ 일이 먼저가 됐습니다.
넷플릭스가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2016년입니다. 하지만 국내 온라인 동영상과 VOD가 그때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전부터 포털과 방송사, 통신사, 케이블사업자들은 인터넷과 TV를 통해 다양한 영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형태의 서비스가 이어지고 겹치면서 오늘날의 스트리밍 환경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스트리밍에서는 영상을 모두 내려받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재생하면서 필요한 데이터가 조금씩 전송되고, 인터넷 상태에 따라 화질이 조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소유하거나 빌려 오는’ 대신, 네트워크를 통해 바로 불러와 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직원의 추천에서 알고리즘의 첫 화면으로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 선택은 공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작 코너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작품이 눈높이에 놓였는지, 직원이 무엇을 추천하는지가 중요했습니다. 인기작은 매장에 있느냐 없느냐가 선택의 조건이었습니다.
지금 OTT의 첫 화면은 이용자마다 다르게 보입니다. 최근에 본 작품, 검색한 내용, 끝까지 시청했는지 여부, 비슷한 취향의 이용자들이 본 작품 등이 추천에 영향을 줍니다. 장르와 배우, 제작연도 같은 작품 정보도 함께 활용됩니다.
이를 두고 “AI가 내 취향을 정확히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추천은 이용자의 행동과 작품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에 관심을 가질 만한 콘텐츠를 예측하는 시스템에 가깝습니다. 때로는 취향에 꼭 맞는 작품을 보여주지만, 예상하지 못한 콘텐츠를 만나게 하기도 합니다.
달라진 점은 추천의 주체만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매장에 들어가 진열된 작품을 차례로 살폈다면, 이제는 검색창에 제목이나 배우 이름을 입력합니다. 무엇을 볼지 고민하는 장소가 매장에서 화면 속 첫 페이지로 이동한 것입니다.

한 계정 안에 나뉜 가족의 취향
비디오 대여점에서 가족이 영화를 보려면 한 편을 함께 골라야 했습니다. 같은 테이프를 빌려 한 대의 TV 앞에 모이는 일이 자연스러운 시청 방식이었습니다.
OTT에서는 하나의 계정 안에서도 여러 프로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마다 시청 기록과 추천 목록, ‘찜’해 둔 작품이 달라집니다. 누군가 액션 영화를 본 기록 때문에 다른 가족의 첫 화면이 바뀌는 일을 줄이고, 각자의 취향을 따로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함께 보는 문화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나 친구가 한 작품을 정해 같이 시청하는 일은 여전히 이어집니다. 다만 예전에는 ‘한 편을 함께 빌리는 것’이 공동 시청의 출발점이었다면, 지금은 각자의 프로필에서 작품을 찾은 뒤 함께 볼 영화를 다시 합의하는 방식에 가까워졌습니다.
비디오 대여점의 회원카드에는 빌린 영화와 반납일이 남았습니다. OTT 프로필에는 내가 무엇을 봤고, 무엇을 찜했으며, 다음에 무엇을 추천받는지가 쌓입니다. 기록의 모양은 달라졌지만, 영화를 고르는 일이 우리의 생활과 취향을 드러낸다는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OTT 첫 화면을 넘기다 한참을 멈추게 된다면, 한때 동네 비디오 대여점의 진열대 앞에서 영화 표지를 하나씩 살피던 시간을 떠올려도 좋겠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콘텐츠를 갖게 됐지만, 결국 한 편을 고르고 누군가와 함께 보는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까지 구독한 것은 아니니까요.
cine21.com, 「2000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1]」
https://cine21.com/news/view/?mag_id=32844&utm_source=openai
koreafilm.or.kr, 「보존(비필름 자료) < 하는일 < 소개 < 기관소개 – 한국영상자료원」
https://www.koreafilm.or.kr/kofa/intro/preservation/non-film?utm_source=openai
m.etnews.com, 「DVD 급속 확산 올 비디오시장 추월 – 전자신문」
https://m.etnews.com/200208200211?utm_source=openai
fnnews.com, 「[머니&컬처―급성장하는 DVD시장] 2002년 국내 매출 1200억 전년의 6배 – 파이낸셜뉴스」
https://www.fnnews.com/news/200404131102502667?utm_source=openai
khan.co.kr, 「‘불법복제 천국’ DVD시장 고사…20세기폭스등 철수 –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article/200703122214401?utm_source=openai